빽칠과 레너드 코헨





강남세브란스병원 갑상선내분비외과

장 항 석



지금도 내 방에는 볼 때마다 가슴을 답답하게 하는 캔버스가 하나 떠억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저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늘 부담되고 또 저런 상태로 계속 방치되고 있는 것도 미안하기까지 하다. 마치 거두지 못한 자식처럼 늘 눈에 밟힌다.


<교수실 한쪽 벽을 차지하고 있는 그림들>

저 캔버스가 이런 상태가 된 것은 사연이 길다면 길다.

파란색 캔버스 뒤에 있는 그림은 내가 본과 2학년이던 시절, <연세문화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당시는 거의 그림에 미쳐 있다시피 했었던 나는, 모든 가치 중 최상위를 그림에 두었었다. 미술반 반장으로 정기 미전을 개최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 할 정도로, 요즘 생각해 보면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당시는 그림을 시작하면 뚝딱 작품이 되어 나오고, 테레핀의 향이 채 가시지도 않은 그림들을 몇개를 나열해 놓고 마무리작업과 새로운 그림작업을 할 정도로 열성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작업들은 늘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졸업을 하고 레지던트, 펠로우를 거쳐 교수가 되면서 그런 일을 감히 엄두를 내기 힘들 정도로 시간도 없었고, 또 언감생심 붓을 들 생각을 할 정도의 여유도 없었다. 유화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또 일단 물감이 좀 마를 때까지 기다렸다 다음 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에 나같이 늘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는 사람으로서는 시작 그 자체가 어려운 것이다.


<일상생활: 수술 후 교수 갱의실에 ‘쓰러진’ 상태. >

그런 나날이 지나다 2017년, 연세대학교 세란미술반 동아리가 50주년을 맞게 되면서 대규모 행사를 준비하게 되었고, 당시 지도교수이던 한광협 교수(연세대 소화기 내과 명예교수)의 뒤를 이어 지도교수가 되었다. 이제까지 우리 미술반의 지도교수님들은 단 한번도 그러신 적이 없었던 것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데, 자리를 물려 주는 자리에서 전임 지도교수님은, “모름지기 지도교수라 하면, 봄, 가을 미전에 의무적으로 작품을 내는 정성은 있어야 한다.”고 학생들, 선, 후배들 앞에서 오금을 박으셨었다. 반박하고 싶은 말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그와 동시에, 선배는 언제나 하늘 같은 존재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하게 되었었다. (더구나 그 자리에는 많은 학생들이 있었다……)

그때부터 봄, 가을 축제 기간에 열리는 정기 미전에 적어도 한, 두 점의 작품을 내야 하는 난데없는 ‘의무’가 내게 부과되었다. 그래도 지도교수인데 학생들처럼 20호 미만짜리 작품을 내는 것은 체면이 서지 않는다는 생각까지 들며, 봄, 가을의 그 시기가 오면 숙제를 제때 하지 못한 사람처럼 불안과 초조에 시달리기까지 한다.


<2017년 세란 미전에 낸 그림>

물론 그림을 그리면 다른 일들을 잠시 잊고 오로지 내 손이 움직이는 방향에 따라 형성되는 이미지의 변화로 행복이라고 할지, 뭐랄지 좀 애매하긴 하나 상당한 위안의 시간이 되긴 한다. 다만, 그걸 시작하기가 너무 버겁다는 것이 문제지만.

지금 저 그림은 학생 때 우리 미술반 동아리방의 우중충한 분위기와 거기에 있던 고물 레코드에서 지직거리는 음향의 레너드 코헨이 흘러나오던 분위기를 그대로 담고 있다. 당시 나는 오로지 파란색 계열의 그림을 그리는데 흠뻑 빠져 있었다. 지금도 여전히 저 푸른 색감의 터치는 내게 추억과 지난 날들의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저 ‘그림’(아직 그림이라 불릴 단계가 아닐 수도 있다.)을 시작하던 때에는 학생 때처럼 금방 뭔가를 만들어낼 수 있을 줄 알았었다. 하지만 그것은 벌써 1년이 넘어가고 있는데 여전히 저렇게 빽칠인 채로 남아있다.

기초작업을 뜻하는 이 빽칠이라는 단계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은 다 이해할 것이지만, 이미 최종의 마무리까지 염두에 둔 상태로 시작하는 것이 보통이다. 단순하게 물감의 질감을 돋우려는 의도가 아니라, 여기는 뭘 배치할 것이니까 이런 식으로 저기는 또 어떤 식으로…… 이렇게 계산을 다 해 두고 하는 것이다.

나도 당연히 그렇게 했던 것인데, 저 빽칠이 마르길 기다리면서 보낼, 잠시라고 예상했던 시간이 한정없이 길어지면서 이런 상태가 된 것이다.

지금 나는 잊고 지냈던 감각이 일깨워지는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토요일, 잠시 한가한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지금, 혼자 교수실에 앉아서 감각을 자극하는 커피향과 그리고 음악을 들으며 저 미완성의 푸른 빽칠이 무거운 시간을 끝내고 세상으로 나올 수 있는 순간이 오길 기다려 본다.

레너드 코헨의 <famous blue rain coat>는 언제나 옳다.

그가 나지막이 읊조리는 감미로운 흐름이 이 방을 가득 채우고, 혹시라도 내 마음을 움직인다면, 이번 가을 미전에는 저 그림이 빽칠이라는 굴레를 벗어나, 당당하게 등장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