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한국시리즈 관람기





연세의대 세브란스병원 병리과
김 기 정


1994년 10월 어느 일요일 오후, 왜 혼자 집에 있었는지 기억도 희미해진 그날 한 소년이 TV 앞에서 환하게 웃었다. 응원하던 팀의 압도적인 한국시리즈 우승을 지켜보면서 환호했고 모든 팬들이 그러했듯이 다음 우승도 그 다음 우승도 그리 멀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세월이 흘러 2023년 11월 8일 저녁 한국시리즈 2차전 당일,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초겨울 답지 않게 따뜻했던 날씨가 거짓말처럼 추워진 그 날, 나는 1994년의 나보다 나이가 더 많은 딸을 데리고 가족과 함께 잠실야구장을 찾았다.

초등학생이던 나는 3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어느덧 청년을 지나 슬슬 중년임을 인정해야 하는 나이가 되어가고 내 주변에 그때 그 시절과 같은 것은 이제 무엇 하나 남아 있지 않지만 한가지 변함없는 모습으로 의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안타깝게도 LG 트윈스의 마지막 우승 장면이었다.

모든 팬들의 확신과 달리 팀은 마지막 우승 이후 우승 문턱에서 늘 좌절했고, 유래없이 혹독했던 암흑기동안은 내내 하위권을 맴돌며 프로야구사 최초로 10년 연속 가을야구 진출 실패라는 초유의 기록을 남겼다. 6668587667, DTD, 탈X, 올해는 다르다 등 실패의 역사는 다양하게 재생산되었고 팬들의 좌절은 더욱 깊어져만 갔다. 이후 길었던 암흑기는 비록 끝이 났지만 그 후로도 다시 10년 동안 가을야구에서는 중요한 고비마다 번번이 탈락의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팀은 올시즌 드디어 일찌감치 정규시즌 우승을 확정하고 한국시리즈에 직행했다. 마지막 한국시리즈 진출이었던 2002년에는 인터넷 예매가 없었던 관계로 아무리 오래된 팬이라도 LG 트윈스의 한국시리즈 인터넷 예매는 이번이 처음인 웃지 못할 상황이었다. 무려 2023년에!

알람까지 설정하고 예매 오픈과 동시에 클릭. 아차 팝업창 닫는 속도가 1초정도 늦었다. 대기번호는 이미 10만번. 나는 1차전 예매에 턱없이 실패했다. 오랫동안 보지 못한 우승에 대한 팬들의 기대감은 더할 수 없이 컸고 예매 경쟁이 내가 경험해 본 그 어느 때보다 치열했다.

비장함이 느껴질 만큼 각오를 다지고 시뮬레이션을 한 후 컴퓨터 앞에 고쳐 앉은 아내와 내가 각각 한 경기씩 예매에 성공해 우리는 2차전을 직관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6차전 예매에 성공했는데 결제하며 혹시 실수로 취소 버튼이라도 누르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난생처음으로 마우스를 쥔 손이 벌벌 떨리는 진귀한 경험을 했다. (하지만 시리즈가 5차전에서 끝나며 이 경기는 열리지 않는다.)

다시 2차전 당일로 돌아와서…

6시 30분 승리를 염원하는 힘찬 응원과 함께 뜨겁게 달아올랐던 경기장은 시작 10분도 지나지 않아 도서관으로 업종 변경이라도 한 듯이 고요해졌다. 선발투수는 아웃 카운트 하나만을 잡고 강판당했고 급히 올라온 불펜의 실점이 이어지며 1회초 이미 0대4. 그냥 정우성이 계속 던지는 게 나았겠다는 농담이 농담처럼 들리지 않는 암울한 현실 (배우 정우성 씨가 이날 경기 시구를 맡았다). 전날 1차전을 이미 접전 끝에 내준 위기 상황 속에 2차전도 시작부터 경기가 기울며 가을야구 업셋의 악몽이 하필이면 가장 중요한 무대에서 부활하는 듯했다.

하지만 오지환의 추격포가 터지며 경기 중반 흐름이 급격하게 흔들렸다. 암흑기 시절 많은 기대를 모으며 데뷔했지만 경기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힘든 시간들을 인내해야만 했고 그런 시련들을 극복하고 이제는 팀의 주장이 된 선수. 애증 그 자체라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하기 어려운 그의 한방에 팬들도 “혹시 인생 경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묘한 기대감을 품기 시작했고 축 쳐져 있던 관중석의 응원 열기도 되살아났다.

그리고 운명의 8회말. 상대를 1점차 턱밑까지 추격한 상황에서 주자는 2루. 시리즈의 결과를 뒤엎을 가장 극적인 역전 홈런이 터진다. 타구는 초겨울 밤하늘을 가르며 저 멀리 담장을 넘어가 돌아오지 않았고 찰나지만 강렬한 순간을 나의 뇌리에 남겼다. 오래 전 팀의 우승에 환하게 웃으며 방방 뛰고 기뻐했던 소년이었던 나는 어느덧 ‘청년호소인’이 되었고 기쁜 순간 웃음보다 눈물이 나오는 나이가 되었음을 실감했다. 가족들의 놀림 속에 눈물을 슬쩍 닦으며 줄어든 남성호르몬을 원망해야만 했다.

다행히 경기는 승리로 마무리되었고 극적인 역전으로 흐름을 탄 팀은, 9회초 2아웃 승리확률 1.3%의 절체절명위기까지 내몰렸던 3차전마저도 대역전 승리를 거두며 우승을 눈 앞에 둔다.

그리고 마침내 11월 13일 가족들과 함께 29년만의 통합 우승 순간을 지켜보았다. 길고도 지루했던 기다림 끝에 맛본 우승의 순간은 분명 두고두고 떠올릴 수 있는 커다란 기쁨이었지만 너무 오랜 기다림은 다소의 허무함도 같이 남겼다.

오래 기다린 끝에 느끼는 커다란 기쁨은 이제 알았다. 이제는 소소한 기쁨을 자주 느낄 수 있기를 바라며 이번에야말로 다음 우승은 정말 멀지 않기를 소망해 본다.